고마운 사람들

지난 1년동안 작업한 첼시의 아파트 개축 프로젝트가 마무리가 되었다. 공사가 마무리가 될 즈음 감리를 위해 현장을 방문하는 가운데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장을 보며, 조건축과 함께 한 첫번째 해인 2023년을 되돌아 본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많은 분들의 도움과 조언 덕분에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잘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원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삐딱하게 서서 숨호흡을 조절하는 저 친구처럼 오늘도 나는 조건축이 담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상상하며 하루를 마친다. 나를 건강하고 밝게 키워준 부모님, 오늘 하루 나의 삶에 의미를 더해주는 가족들, 내 마음 속 따뜻한 기억을 채우는 지인들의 고마움에 더욱 보답할 수 있는 2024년이 되었으면 한다.

Renzo Piano said

……Creativity is only possible when you share the creativity…..You know what you need to be creative? You just need to decide to become creative……

John Mackey said

Most importantly, life is short and that we are simply passing through here. We cannot stay. It is therefore essential that we find guides whom we can trust and who can help us discover and realize our higher purpose in life before it is too late.

from Conscious Capitalism

조건축

학업을 마치고 뉴욕에 와서 일을 시작한 지 벌써 14년이 지났다. 대학원 졸업학기 때, 과연 내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일해보고 싶은 사무실들을 찾았던 기억이 난다. 회사와 프로젝트들이 맘에들고 그곳에서 열심히 일해보고 싶다며 직접 우편으로 편지와 포트폴리오를 보낸 회사들 중 다섯군데에서 인터뷰를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SOM, Rogers Marvel Architects, 1100 Architects, Polshek Partnership, and Cook+Fox. 운좋게도 SOM과 Rogers Marvel Architects 에서 오퍼를 받을 수 있었고, 여러 고민 끝에 Rogers Marvel에서 뉴욕에서의 첫 사회경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Rogers Marvel 에서는 궂은일 마다않고 시켜주는 일을 열심히 하며, 참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Shuji 라는 친구는 지금도 종종 만나면 나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형같은 선배이다. 일도 재밌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참 많은 회사였지만 경제상황이 안좋았던 2009년 회사를 떠나야 했고, 운좋게도 그 당시 SOM에서 일하던 친구덕분에 다시 SOM과 연락이 되어 회사를 옮길 수 있었다. 결국 뉴욕에 와서 고민하던 두 회사 모두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In front of competition study models on the wall in 2009

그 당시 무언가 운명적인 이유 때문에 이렇게 SOM으로 옮기게 된 게 아닌가 하며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회사를 다니면서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항상 궁금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SOM에서의 직장생활을 하면서 발견한 이유들 중 하나는 바로 대학원 동기들인 영섭이와 진영이, 이 회사에서 알게된 재영이, John Locke, 현대, 제일이, 도환형님, 우현형님, 봉환형님들과 함께 많은 추억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 이 회사에 와서 얻은 의미있는 경험 중 하나는 New School University 란 프로젝트 팀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첫 디자인단계부터 공사를 시작하는 즈음까지 3년간 참여할 수 있었다. 매우 바쁜 프로젝트 스케줄 덕분에 SOM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 프로젝트를 하며 보냈다. 지금도 14번가와 5번 에비뉴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이 건물을 지날때면 항상 자랑스럽고 바쁘게 일하던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The New School Site Visit in 2013

어쩌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장면이 이 회사를 다니며 펼쳐진다. 이 회사로 옮기게 된 진정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날,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바쁜 프로젝트 스케줄 덕분에 그녀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었고, 그렇게 시작한 우리의 인연은 오늘 하루 우리 가족의 삶을 가득 채우는 행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The New School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무렵 대학원 선생님이셨던 Toshiko Mori가 운영하시는 사무실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SOM을 나와 나의 뉴욕 실무기간동안 가장 많은 배움을 얻은 Toshiko Mori Architect로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유학 오기 전, 미국으로 대학원 지원서를 보내고 결과를 기다릴 무렵, Toshiko 선생님께서 직접 전화로 합격 소식을 알려주셨다. 새벽 1시쯤 잘 되지도 않는 영어로 합격소식을 듣고 감사하다고 말하며 머리숙여 인사하는 나의 그때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고 두근거리는 내 인생의 추억의 명장면 중 하나이다. 그렇게 시작된 Toshiko 선생님과의 인연 덕분에 Toshiko Mori Architect에서 5년동안 일하면서 브라운 대학교 환경과학 연구동, 뉴욕주 북부에 한 미술관장을 위한 주택, 그리고 맨하탄 한켠에 자리잡은 극장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Euna’s visit to Toshiko Mori Architect in 2014

토시코 선생님 사무실에서 일한 지 5년째가 되었을 때 즈음, 독립해서 내 사무실을 열고싶은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오래동안 생각해왔던 일이었고, 토시코 선생님 밑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디자인부터 시공까지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할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던 것 같다. 하지만 뉴욕에 와서 일자리는 얻을수나 있을까 하며 고민하던 내가 건축회사를 차린다는 것은 망상같은 일이라는 생각도 버릴수는 없었다. 곧바로 시작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기대보다는 걱정의 충고를 더 많이 듣는 가운데 대학원 친구인 도영이형을 통해서 Ennead라는 회사에서 나와 비슷한 경력의 건축가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좀더 큰 회사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팀워크와 리더쉽을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뷰에 응했고 이 회사 한켠에 내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My desk photographed by Jazzy in 2017

Ennead란 회사는 원래 Polshek Partnership이란 이름의 회사였는데 회사의 창립자였던 James Stewart Polshek이 은퇴한 후 9명의 젊은 파트너들이 이끌면서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9명의 신을 의미하는 Ennead란 새로운 이름 회사이름으로 바뀐 젊지만 오랜 경력을 담고 있는 건축회사다. 내가 뉴욕에 처음 인터뷰 하러 왔을 때 Polshek도 그 중 하나였지만 인터뷰하러 가는 날 인터뷰 올 필요 없다며 나에게 퇴짜를 준 회사였기에,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은 나름 내 뉴욕 삶에서 오래전부터 계획되었던 것이었다. 뉴욕에 있는 Rose Center, Brooklyn Museum, Carnegie Hall, Standard Hotel, Newtown Creek Wastewater Treatment Plant 등 주요 공공건물들을 디자인한 이 회사에서 미국 내 프로젝트들을 경험하게 될 줄 알았는데, 막상 처음으로 참여하게 된 프로젝트는 중국 샹하이에 있는 오피스 프로젝트였다. Ennead에서 일하는 지난 6년간 내 손을 거쳐간 샹하이의 오피스 건물들은 우리 가족 모두의 손가락 발가락으로도 모자랄 만큼 많다.

Ennead에서 6년간 일하는 동안 Peter Schubert 란 파트너와 많은 프로젝트를 같이 했다.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중국 오피스 프로젝트 이외에 다른 프로젝트를 경험하고 싶었는데 막상 회사를 떠날 때 즈음에는 중국 프로젝트를 많이 하시는 Peter와 함께 일했던 기억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고, 그 분 덕분에 꾸준하게 오피트 타워 프로젝트타입에 관한 경험을 쌓은 것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회사를 떠나는 마지막 주에 인사를 드리러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함께 작업했던 공모전 스케치를 들고 가서 돌려주려한다 했더니, 나보고 들고 가라고 하시며 사인도 해주셨다. 2016년 부터 2022까지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했고, 많은 것들을 배웠으며, 함께 만든 수많은 추억들 덕분에 마지막 회사를 나서는 길이 무거웠다.

Peter’s Sketch from a competition project in Shanghai

지난 7월부터 시작된 나의 도전은 내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지난 14년간 회사에 몸담고 살아온 삶의 패턴에서 조건축이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하는 삶의 패턴으로 변경하는 데는 적응기간이 적잖게 필요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찾을 수나 있을까 했는데 운좋게도 맨하탄에 있는 주택 개축 프로젝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꿈꿔왔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대학원을 마칠 즈음 과연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고민했던 내가 지난 14년간 크고작은 회사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지금 난 14년전과 같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궁금하다. 14년 이후의 나는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을까? 그때 내손으로 쓰게 될 조건축의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다.

The last day at Ennead in 2022

This is what the Tin Man does in the Wizard of Oz.

He walks along the yellow brick road with Dorothy and her friends, hoping that when they get to Oz, the great wizard will give him a heart, while the Scarecrow wants a brain and the Lion wants courage. At the end of their journey they discover that the great wizard is a charlatan, and he can’t give them any of these things. But they discover something far more important: everything they wish for is already within themselves. There is no need of some godlike wizard in order to obtain sensitivity, wisdom or bravery. You just need to follow the yellow brick road, and open yourself to whatever experiences come your way.

Homo Deus: A brief History of Tomorrow

All the Way to America

아이들 덕분에 내 삶 가운데 어느때보다 많은 책을 읽는다. All the Way to America 는 아이들이 참 좋아하는 책 중 하나다. 아버지와 통화중에 우연히 이 책의 내용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우리 가족버전의 All the Way to America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의 할아버지(조창식)께서는 전라남도 주암면 대광리에 있는 뒤지동이란 작은 동네에서 자라셨다고 한다. 지금은 주암호 댐 공사로 인해 현재 침수되고 존재하지 않는 이 동네를 떠나시던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에게는 더 밝은 미래를 위해 큰 꿈을 품고 그리 멀지 않은 도시인 전라남도 순천으로 향하셨다고 한다. 작지만 이 지역에서 큰 도시중 하나였던 순천에서 제조(원목을 자르는 기술)기능을 배우셨고, 순천에 있는 제재소에서 일자리를 얻어, 주암면 요곡리 출신이신 친할머니(정삼엽)와 함께 이 도시 한켠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셨다고 한다.

순천에서 태어나시고 자라신 내 아버지(조철수)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 제재소에 방문했던 기억을 말씀해 주셨다. 커다란 원목을 자르는 거대한 원형의 톱날과 그것으로 잘려져 나온 나무판에 드러나는 나이테와 나무냄새를 기억하셨다. 그 옛날 작은 도시의 제재소이지만 거대한 기계가 주어진 규칙에 맞게 할아버지의 손놀림에 의해 돌아가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반듯한 목재판들이 아버지에게는 신기한 모습이셨다고 한다.

청년이 된 아버지는 큰 꿈을 품고 순천을 떠나 홀로 서울로 상경하였고, 열심히 공부하셔서 공무원이 되셨다. 공무원 생활 중에 만나게 된 나의 어머니(김점자)와 함께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시고 우리가족의 서울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상상하시고 직접 만드시는 것을 즐기시는 분이셨다. 아버지께서 만드신 많은 것들 중에서 내 기억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미식축구 보드게임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항상 즐겨 보셨던 미식축구를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보드게임으로 만드셨다. 여동생과 함께 셋이서 어린 시절 많은 추억을 그 보드게임에 담은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께서는 전라남도 고흥군 과역면에서 유명한 우등생이셨단다. 여자는 공부할 필요 없다는 외할아버지의 철학을 이기시고 열심히 공부하셔서 홀로 서울로 상경하시고 젊은 시절 일찍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셨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한국의 보건 복지를 위해 부지런하게 사신 어머니는 오늘도 뒷산의 맑은 공기와 정상에서 펼쳐지는 서울의 새벽풍경을 깨우며 하루를 연다. 유학시절 여름방학동안 한국에 머물러 있을 때, 어머니와 함께 걸어서 어머니 고향까지 가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그렇게 시작한 도보여행 아홉번째 날 포기하고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미소를 짓게하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밤낮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어머니를 내가 참 많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평생을 서초동, 방배동, 사당동 근처에서 자란 나(조대경)는 대학을 마치고 건축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대학원 공부를 하러 이곳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에서의 첫 삶을 시작한, 이제는 미국에 있는 고향이 된 보스턴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서 뉴욕으로 내려와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뉴욕에서 다양한 실무경험과 사회경험을 쌓으며 바쁜 삶을 보내는 가운데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브루클린 한켠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의 하루하루를 가득 채우는 두 아이들 덕분에 뉴욕에서의 오늘 하루가 더욱 의미있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All the Way to America를 읽었을 때 나도 모르게 진한 감동을 느꼈던 건, 아마도 그 이야기가 내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느낀게 아닌가 싶다. Dan Yacarino의 증조할아버지인 Michael Yacarino 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Sorrento에서 떠나면서 가족과 나누는 대화는 내 할아버지가 뒤지동을 떠났을 때, 내 아버지가 순천을 떠났을 때, 내가 서울을 떠났을 때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할아버지로부터 전해져서 아버지를 거쳐 내 손에 쥐어진 우리가족버전의 Little Shovel을 내 아이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의 오늘 하루를 마친다.

“Work hard” His father told him, handing him the little shovel

“But remember to enjoy life”

“And never forget your family” His mother said. She hugged him and gave him their few family photographs and her recipe for tomato sauce.

from All the Way to America by Dan Yacarino

10년 전에

from the Kitchen

이 스케치를 오랜만에 보니 10년 전에 이 장면을 바라보는 나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다. 한동안 멈추어진 눈앞의 광경을 기록하는 가운데, 그 순간이 자연스럽게 내 인생의 한 시점으로 기록된 것이다. 새해에는 이런 여유로운 순간들에 내가 자주 등장했으면 좋겠다. 이 글이 닿는 사람들에게도 여유로운 한해가 기다리고 있길 바라며, 역사에 기록될 2021년의 한해를 마무리한다.

스탠드

책상 스텐드

아마도 고등학교때쯤이었을까. 어느날 어머니께서 이 등을 사 오셨다. 할로겐 램프에서 방출되는 빛의 색이 햇빛과 비슷하고, 원적외선을 방출한다고 하여 수험생 눈건강, 몸건강에 좋다는 광고를 보시고 사셨던 것 같다. 그 덕분인지 대학교 가서 공부고 할 수 있었고 미국으로 유학도 올 수 있게 되었다. 미국에 유학오면서 뭘 가져올까 고민하던 내가 이 등도 함께 소포로 보내면서 혹시나 깨지지나 않을까 버블랩으로 두껍게 싸서 버블공으로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이 녀석과 함께 만든 추억이 나에게는 꽤 소중했나 보다. 다행이도 잘 도착한 이 녀석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이곳 뉴욕까지 같이 와서 잘 살고 있다. 오늘 한켠에 한동안 켜지지 못하고 놓여있던 걸 다시 내 책상에 놓아 불을 켜고 생각을 적는다. 아마도 빛의 색깔 때문인지 다시 예전 수능 공부를 하던 시절로 잠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하다.